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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의 산책/독서일기

23. 노땡큐 - 며느라기 코멘터리

by lucky-yu 2019. 6. 27.

매년 의무적으로 들어야하는 직장성희롱예방교육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앞서가던 동료직원이 본인이 도서관에 반납하려던 책을 나에게 추천한다. 제목이 '노땡큐' 네요? 뭔가 시크한 책일거 같은데요? 내가 이렇게 반응하자 그 직원이 내가 보면 재미있어 할거란다.

나는 <며느라기>를 본 적은 없다. 이전 팀에서 여자 과장님께서 <며느라기>를 본 적이 있냐고 물으셨을때 '아니오'라는 답변을 드렸었다. 그 이후 그 과장님은 <며느라기>에 대해서 더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이 책을 읽으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같은 여자들 사이에서도 사회적 관습에 대한 네거티브한 이야기를 할 때는 자기검열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여성들에게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경우에도 말이다.

<며느라기>에서 설, 추석 에피소드가 나온다. '요즘 세상에 아직도 남자밥상, 여자밥상 따로 차리는 데가 있어?' 하아.. 저희 시가가 그렇습니다만.. 그렇다. 우리 시가는 전형적으로 가부장적인 특색?을 지닌 곳이다. 임신 6개월인 나에게 한복을 입고 큰 집에 가자고 하신다. 첫 인사니까.(물론 네에~~~?? 라는 나의 한마디에 없던 일이 되긴 했지만.) 

첫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며느리 4명이 하루 종일 차리고 치우고 차리고 치운다. 나 포함 3명이 임신 중이었고 모두 5-7개월된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눈치를 보며 부엌 근처에서 안절부절 못한다.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인가. 그들의 엄마인가 아빠인가. 누군가는 아이를 본다는 명목으로 아예 방에 쳐박혀 있거나 밖에 나가 들어오지 않는다.

Episode1.

작년 초 'B급 며느리'라는 영화가 화제가 되었었다. 가부장 문화에 반항하는 며느리를 B급이라고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나는 그럼 F급이야.'

'아니, 넌 폐급 며느리야'.

'그래 그럼 갈라서. 명절 때 큰 집가서 몸종 노릇 하기 싫어한다고 버릴 정도라고 생각하면 지금 날 버려. 나도 같이 살고 싶지 않네?'

'다들 하는 거자나'

'다들 하는 거면 나도 해야 해? 그게 여성에게 너무나 불합리하다는 거, 오빠도 알잖아. 본인들 조상이면 본인들이 해야지, 왜 피 한방울 안섞인 며느리들끼리 서로 일을 누가 더하네 덜하네, 일찍 왔네 늦게 왔네 아웅다웅 해야하는지 모르겠어.'

'남자들이 못하면 도와줄 수도 있는 거자나'

'여기는 1도 안하자나. 여자들이 '도와주는' 개념이면 남자들이 주도적으로 해야하는거 아냐? '당연히' 여자들이 아니 여자들'만' 해야한다고 생각하자나.'

'.....'

'여기는 며느리들이 과일도 깎아서 남자들한테 '올리고', 먹다 남은거 먹더라? 하아..... ..... .....'

Episode2

이런 식의 대화를 나는 겁도 없이... 시모, 시부, 시동생 앞에서도 했다. 시모는 예전에 비하면 일을 거의 안하는 것이며, 그래서 요즘은 먹어볼 것도 없다신다. 그렇게 일을 했음에도 당신은 힘든 거 하나도 몰랐다고. 옆에 있던 남편과 시동생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엄마, 맨날 서울오는 차 안에서 엄청 궁시렁댔자나~!!' 이거슨 무슨 시츄에이션~? 그렇다. 지금의 시모들도 과거 가부장제의 희생양이었다. 현재의 희생양은 며느리. 다만 수혜자가 당신 남편에서 아들로 바뀐 것이다. 며느리가 일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이 손에 물을 묻혀야한다. 그러니 태세를 전환하는 것이다. 나의 시모는 여자이기 이전에 아들 엄마로 사신 분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해는 간다. 이해는 하지만 똑같이 당할? 생각은 없다. No, thank you.

Episode3

시동생 왈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헐. '페미니스트가 뭔가요? 저는 페미니스트가 뭔지 몰라요. 그 개념도 모르고 책을 읽어본 적도 없어요. 저는 그냥 불합리성을 말하는 거예요. 오씨 집안 조상님들 차례를 지내는데 왜 오씨 집안 사람들은 상을 안차리죠? 이상하지 않아요?'

'여자들이 음식을 더 잘하니까 그렇죠'

'저 진짜 못하는데요.. 저번에도 설겆이 하다가 접시 2개 깨뜨렸어요. 그리고 음식은 하면 할수록 늘어요. 자꾸 안하니까 계속 못하는 거죠.'

Episode4

중고등학교 시절, 나도 부모님따라 할머니댁에 갔었다. 엄마는 어른들께 바로 인사드리고 부엌으로 직행.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셨다. 아빠는 친구들 만나러 나가서는 새벽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나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별 생각 없이 자유롭게 티비보다가 부엌에 가서 식혜먹고, 티비보다가 부엌에 가서 전을 먹었다. '유씨 집안 사람'이기에 누렸던 특권이었다. 어느 날 작은 아버지가 나에게 '임마, 너도 이제 컸으니 부엌에서 일 좀 해야지?' 라고 하셨다. 옆에 있던 엄마가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나 하나 부려먹으면 됐지, 왜 내 딸까지 일을 시키려고 해요? 너 방에 들어가서 티비 봐'

 

나는 이런 엄마 밑에서 자랐다. 여자도 배워야하며 안정된 직장과 경제력을 가져야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소위 '남녀평등사상'이랄까. 물론 우리집은 딸-딸-아들을 가진, 가부장적인 사상이 의심되는 가족이었으나 한번도 우리집이 '그런집'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최근 1-2년 사이에 아빠가 세상 가부장적이란걸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가부장적인 관습이 답답했던 엄마는 나에게 이 틀을 깨라고 자꾸 가르쳤던 것 같다. '85년생 김지영' 로 키워진 것인가;;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이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그래서 그냥 이상하면 이상하다고, 싫으면 싫다고 말하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폐급' 며느리이니. 물론 그 때마다 현실의 무구영과 눈치, 갈등, 전투를 겪어야하지만 말이다. 경험상 이러한 전투는... 할 만한 가치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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