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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의 산책/독서일기

8. 어쩌다 가방끈이 길어졌습니다만

by lucky-yu 2020. 5. 18.

나탈리 크납은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에서 '불안을 용인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했다. 만약 유학 초기로 돌아가서 단 한 가지만 바꿀 수 있다면, 그 불안함과 초조함을 조금 내려놓겠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기회들과 가능성에 집중해서 한번 마음껏 살아보고 싶다. (_31)

오직 도움이 되는 것은 저녁에 연국실에 남아 이것저것 생각하고 다른 방법으로 분석해보면서 혼자 공부했던 시간이다. ... 논문의 최종 원고에는 들어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고민과 시도들은 내 안의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이는 모양이었다. 그러한 축적이 없다면, 질문을 받았을 때 결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음을 알았다. ..... 그런 경험을 몇번 하고 나니, 노력한다는 건 마치 정원에 씨앗을 심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뭔가를 계속 열심히 하는데,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어 보일 떄. 실망감 때문에 '뭐 이런 삽질이... . 이걸 계속해? 말아? 라고 내 노력에 대해 의심을 하기도 한다. 그런 막연한 날이 계속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온도가 알맞고, 볕이 적당한 하루가 선물처럼 찾아온다. 그러면 그 언젠가 내가 심어 두고도 까맣게 잊고 잇던 씨앗들이 여기저기서 움트기 시작한다. 손톱처럼 작디작은 새싹들이 자라서 결국 내 삶의 꽃이 되고 나무가 된다. 어쩌면 박사가 될 자격을 묻는 시험은, 그 갑갑하고 지난한 씨앗 뿌리기의 과정을 정직하게 해냈는지 묻는 시험이 아닐까.(_93)

하루키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커피를 내려마신 후, 바로 글쓰기를 시작한다고 했다. 하루에 원고지 20매씩 규칙적으로 쓴단다. 잘 써지는 날에도, 안 써지는 날에도 꼬박꼬박 20매씩을 채운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밖에 나가서 달리기를 한다. 그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되어 하루키의 멋진 작품들이 완성된 것이다. ..... 결국 욕심을 내려놓고, 매일 지킬 수 있도록 목표를 낮게 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200자, 저녁에 300자를 쓰되 매일 쓴다.' 이 다짐을 지키면서부터 비로소 마지막 챕터를 조금씩 써나갈 수 있었다. ... 아주 작은 일을 오랜 시간에 걸쳐 매일 하는 것. 큰 목표를 이루는 방법으로 그보다 좋은 방법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_115)

박사학위가 내게 맞지 않는 옷이라고 느껴질 땐 <프레즌스>의 저자인 에이미 커디 교수님의 'Fake it until you become it'이라는 강연을 떠올린다. ...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되나? 이런 걸 할 자격이 있나? 라는 생각이 들 때는 흉내라도 내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계속 하는 거죠. 하고, 또 하고... . 너무 무섭고 힘들고 피하고 싶더라도, 진짜 할 수 있는 그 순간이 올 때까지" (_120)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목표에 더 가까이 갈 수 없었을까. 이제 보니, 아주 중요한 것 하나가 빠졌다는 생각이 든다. 실패해보는 것. 정말 질릴 때까지 실패해보는 것. 넘어지고 회복하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목표가 더 명확해진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실패의 과정을 통해 막연한 열정이 구체성과 방향성을 갖춰간다는 사실도 미처 알지 못했다.(_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