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ky-yu 2018. 12. 26. 07:15

그래도 만약 '내 취향의 글들 프로듀스 101'을 벌인다면 제일 높은 의자에 앉을 이는 스티븐 핑커다. 세계적인 석학인 그가 풀어내는 풍성한 콘텐츠 자체가 압도적이기도 하지만, 그의 문장 자체가 갖는 독자적 매력이 있다. 명료하고 간결하며 지루할 틈을 안 준다. 흥미로운 예화를 적재적소에 작도 꺼내든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매력은 시니컬한 유머감각이다. 인류의 폭력성, 역사, 본성 등 거창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농담을 던진다. ..... 그의 대작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고양잇과의 글' 중에서도 최고봉이다.(_37)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꼽자면, 먼저 북홀릭 첫 모임 때 함께 읽은 위화의 산문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가 있다. 작가의 실제 경험을 통해 문화대혁명 당시 얼마나황당한 일들이 벌어졌었는지, 반대로 급속하게 천민 자본주의화된 현대 중국 사회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민, 혁명, 루쉰, 산채, 홀유 등 열개의 키워드로 생생하게 보여준다.(_65)

북홀릭의 소수파인 남성 법관, 그중에서도 소수파인 공대 출신 판사가 추천해준 책도 있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다. SF중단편집이라고 분류해야 할 텐데, 작가가 다루는 이야기, 그리고 배경을 이루는 수학, 물리학, 언어학, 뇌과학 등 학문의 폭과 깊이가 대단하다.(_66)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달라져버렸다. 대하소설은 커녕 조금만 두꺼운 책 앞에서도 멈칫거린다. 사실 읽자면 지금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을 텐데 지레 겁을 먹게 되어버렸다. 나리를 먹을수록 하루도 짧고 일 년도 휙휙 지나가고 남아 있는 나날이 벌써 손에 잡히는 것만 같다. 내일이 없는 사람마냥 여가가 생겨도 그저 하루하루의 즐거움을 먼저 이리저리 찾다가 오히려 아무 재미도 없이 흘려보내고 말 때가 많다.(_85)

결국 이야기란 각자의 욕망과 감정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접했던 그 수많은 이야기의 주어는 대부분 남성에 편중되어 있었다. 여성 작가가 쓴 [제인 에어] [빨간머리 앤] [작은 아씨들]이 유독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 작품들을 통해 겨우 여성이 주어인 세계를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아무리 똑똑해도 교사가 되는 것 정도가 꿈의 최대치인 세계 말이다.(_106)

암담하던 고시생 시절은 벗어났지만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할때마다 벽에 부딪히곤 한다. 그럴 때 떠올린다. 그래, 나는 에이스가 아니었어. 팀의 주역이 아니면 어때?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걸 하고 있으면 그걸로 족한 거 아냐? 누가 비아냥거려도 웃을 수 있게 된다. 죄송함다. 제가 원래 에이스가 아니거든요. ..... 내가 감히 이렇게 책도 쓰고, 신문에 소설도 쓰고, 심지어 드라마 대본까지 쓰고 할 수 있었던 힘은 저 두 마디에서 나온 것 같다. 나도 내가 김영하도 김연수도 황정은도 김은숙도 노희경도 아닌 걸 잘 알지만, 뭐 어때?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나는 나만의 '풋내기 슛'을 즐겁게 던질거다. 어깨에 힘 빼고. 왼손은 거들 뿐. (_114)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생활태도를 갖고 있는 나인데도 요즘 나의 이런 모습에 대해 고민이 많다. 이 나이를 먹고도 말이다. 고민하는 이유는 비생산적이어서가 아니라, 결국은 즐겁지조차 않아서다. 티브이나 스마트폰을 보면서 얼마 동안은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콘텐츠는 언제나 부족하고, 눈은 피로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중독자처럼 끊임없이 다른 걸로 다른 걸로 넘기고 넘기고 넘기게 된다. 무한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이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인 것 같다.(_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