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야마구치 슈)
이 책을 읽으며 좋았던 점은 세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유명한 인물들과 그들의 저서들에 대한 리스트를 만들 수 있다는 것, 둘째, 시대의 명언들을 일목요연 정리해 놓았다는 점, 셋째, 그들의 사상을 차용하여 현시대의 현상을 해석한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고 있자면 지적 욕구가 절로 생긴다. '페르소나'는 알지만 그것의 정확한 사용법을 모르기에, '자유로부터 도피'는 들어는 봤지만 그 뜻을 모르기에. '니체'라는 사람은 알았지만 그가 '르상티망'을 말한 것은 몰랐기에(물론 르상티망도 처음 들어봤다).
여러모로 나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다면적인 나의 상태? 즉,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나의 태도에 대해 혼란스러웠고 때로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이 여러 페르소나를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특정 상황에서의 페르소나가 다른 상황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좋지 않다는 점이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개념은 실제로 내가 불확실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이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정신줄?을 붙잡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딸아이의 미래가 바뀌는 상황.. 누구에게도 나 대신 선택해달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너무 무섭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이 자유 때문에 나는 지금 불안한거야.. 내가 지금 불안한 건 당연한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상황을 객관화할 수 있었던 덕분에 위로를 받았고, 슬기롭게까지는 아니어도 날뛰지 않고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철학이 삶의 무기가 되어 어려움을 헤쳐나가고 내 삶을 보다 이성적으로 바라보는데 도움을 준 책이었다.
르상티망(resentment)을 여느 철학 입문서에서처럼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강자에게 품는 질투, 원한, 증오, 열등감 등이 뒤섞인 감정.'_50
그렇다면 왜 누군가는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에 갈 필요 없어. 파스타 체인점으로 충분해" 같은 공허한 주장을 하는 걸까? 마음속 깊은 곳에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은 격조 높은 음식점이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세련된 취미와 미각을 갖고 있다는 일반적인 가치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다는 가치판단을 뒤엎고 싶다는 르상티망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은 허황된 가치관에 물들어 있지 않으며 시대를 앞서가는 쿨한 사람이라고 도취되어 있을 확률이 큰데, 만약 그렇다면 솔직하게 "나는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에는 별로 가 본 적이 없지만 파스타 체인점도 아주 맛있어"라고 하면 될 것이고, 더 나아가 단순히 "나는 파스타 체인점을 좋아해"라고 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하지 않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말해서는 자신의 르상티망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_55
이 책에서 나에게 가장 도움을 준 부분 중 하나이다. 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타인의 사회적 지위가 나보다 높으면 가슴이 답답하다. 그 아파트는 별로야, 그 직업은 주변 사람만 좋지 뭐 라는 식의 르상티망을 해소하기 위한 발언들을 했었다. 참 구차하고 찌질하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하게 그 아파트를 잘 모르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도 만족스러운 곳이야 라고 하면 될 일이다. 난 내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어 라고 하면 될 일이다.
인격(personality)은 그 자체의 정의로 볼 때 본래 짦은 시간에 크게 변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상황이나 주변과의 관계를 위해 인격을 달리 포장해야 할 때가 있다. 이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사람이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이다. 그는 인격 가운데서 외부와 접촉하는 외적 인격을 페르소나(persona)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페르소나는 원래 고전극에서 배우가 사용하는 '가면'을 뜻하는데, 융은 페르소나를 한 사람의 인간이 어떠한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는가에 관한, 개인과 사회적 집합체 사이에서 맺어지는 일종의 타협이라고 정의했다._57
사람의 인격은 다면적이어서 우리는 실제로 어떤 장소에서 걸치고 있던 페르소나를 다른 장소에서는 또 다른 페르소나로 바꿔 쓰면서 어떻게든 인격의 균형을 유지해 살아간다. 인간이 어느 정도 마음 편히 살아가고자 한다면 일종의 다중인격도 필요하지 않을까?_59
사무실과 집에서의 페르소나 사이에 크나큰 차이가 있다. 사무실에서는 합쇼체 사용은 기본이고 사랑의 불시착, BTS가 뭐예요 모드이다. 집에 돌아오면 구연동화 전문가이고 현빈의 콧날, BTS 춤사위에 연신 감탄한다. 이것이 정상이라니 다행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정말 상황을 납득해서 움직이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수사학>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을 설득해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는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로고스(logos)는 논리를 뜻한다. 논리만으로 사람을 설득하기는 어렵다고 하지만, 한편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기획이 사람들의 찬성을 얻기도 어려울 것이다. .....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두 번째로 꼽은 것이 에토스(ethos)다. 에토스는 에식스(ethics), 즉 윤리를 뜻한다. 아무리 이치에 맞는 말이라 해도 그 말을 하는 화자가 도덕성을 의심받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없다. ..... 파토스(pathos)는 패션(passion), 즉 열정을 가리킨다. 본인이 신념을 갖고 열정을 드러내며 말해야 비로소 타인이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매우 흥미롭게도 <파이드로스>에서는 리더에게 레토릭이 필요하다는 파이드로스의 주장을 소크라테스가 비판하면서 '진실에 이르는 길을 대화밖에 없다'고 설득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크라테스는 교묘한 말솜씨로 사람을 움직이는 기술을 사람 마음을 나쁜 길로 홀리는 것이라며, 레토릭을 '속임수'라고 일갈한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수사학>에 대한 강렬한 역공이었다. 확실히 히틀러의 마술적인 연설의 위력을 알고 있는 현대의 우리에게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지적은 상당히 설득력있다_73
논리와 도덕성, 그리고 열정이 밑바탕이 된 레토릭이 과연 속임수라고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었다. 아, 히틀러의 레토릭도 논리적이며(그것 나름대로) 그의 도덕성에 기반했었을 수 있으며(그의 도덕성에 대해 모르므로), 열정적이었지(유대인 학살에 쏟은 노력과 시간을 보라). 그리고 깨달았다. 레토릭이 아니라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소크라테스 의견이 더 설득적이었다. 그래서 나의 결론은.. 레토릭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대화로 설득할 수 있는 리더가 되자. 말은 쉽지.
잘 알려져 있듯이 16세기에 일어난 종교 개혁은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되었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에서 파문을 당해 신성로마제국에서 추방되었지만, 작센 선제후의 보호를 받아 신학 연구에 한층 더 몰두했다. 그 후 루터의 가르침은 독일 뿐 아니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급기야 프로테스탄트 운동으로 이어졌다. .....
마르틴 루터의 저돌적인 외침을 이어받아 이를 더욱 명확히 정비해 프로테스탄티즘에 확고한 사상 체계를 심은 이가 바로 장 칼뱅이다. 이 사상 체계가 마친내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초석이 되어 세계사를 움직일 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장 칼뱅 사상의 핵심은 무엇일까? 칼뱅의 사상 체계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가 바로 '예정설'이다. 예정설은 다음과 같은 사고관이다. "어떤 사람이 신에게 구원을 받을지 못 받을지는 미리 결정되어 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선행을 쌓느냐 못 쌓느냐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
그렇다면 노력 여부에 관계없이 구원받을 사람은 미리 정해져 있다는 믿음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까? 이 물음에 "그 반대다!"라고 외친 사람이 막스 베버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칼뱅파의 예정설이 자본주의를 발달시켰다는 논리를 펼쳤다. .....
오히려 전능한 신에게 구원받기로 미리 정해진 사람이면 금욕적으로 천명(독일어로 beruf, 이 단어는 '직업'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옮긴이)을 다해 성공하는 인간일거라 생각하고 '자신이야말로 구원받기로 선택된 인간'이라는 증거를 얻기 위해 금욕적으로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는 것이 막스 베버의 논리다._75~79
한 마디로, '나는 열심히 일했으니까 보상받을 거야' 보다는 '보상을 받는 이는 이미 나로 정해져있어. 봐, 나는 열심히 일했자나.'라는 메커니즘이 동기부여가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회사의 인사시스템으로 연결한다. 예정설이 동기부여가 된다면 노력이 대가로 연결된다는 인식에 기반한 인사고과 시스템을 재고해봐야 한다고 결론 짓는다. 여기서 드는 의문. 그렇다면 인사담당자가 미리 승진자를 정해놓았다고 선언이라도 해야한다는 것인가. 그러니 당신들이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이게 뭔가.
책에서도 나와 있듯이 승진자가 미리 정해져 있었다는 느낌적인 느낌은 직장인이라면 누구가 받을 것이다. 그 정해지는 루트는 보고서일 수도 있고, 점심식사일 수도 있고, 저녁식사일 수도 있고, 술자리일 수도 있다. 사내 예정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예정'설'이지 않은가). 단지 인사시스템이라는 보기좋은 포장지로 감추어 놓을 뿐. 그래서 혹자는 정치도 능력이라고 했다. 그러나 구원받을지도 확실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내 정치판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그 시간에 내 건강을 관리하고 내 일에만 몰두하고 싶다. 승진에 승부를 걸기 보다는 나의 컨텐츠에 승부를 걸고 싶다. 너무 순진한 직장인일까.